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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의인물

김문기(金文起)

옥천의 인물 김문기

김문기(金文起 : 1409 ? ~ 1456)

조선 전기의 충신으로 초명은 효기, 자는 여공, 호는 백촌, 본관은 김녕이다. 김녕군, 김시흥의 9대세손이며 호조판서 김순의 손자요 증영의정) 김관의 아들로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 1426년(세종 8)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또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상을 당했을 때 3년간 시묘하였고, 모친상을 당했을 때에도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렀으므로 사림에서 효자라 일컸고 그 마을을 효자동이라 불렀다.

그는 문무를 겸비했으며 부정·불의·비리를 용납지 않는 강직하고 청렴한 성품을 지녔으므로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조선 전기의 충신으로 초명은 효기, 자는 여공, 호는 백촌, 본관은 김녕이다. 김녕군, 김시흥의 9대 세손이며 호조판서 김순의 손자요 증영의정 김관의 아들로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이 뛰어나 1426년(세종8년)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또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상을 당했을 때 3년간 시묘하였고 모친상을 당했을 때에도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렀으므로 사림에서 효자라 일컫고 그 마을을 효자동이라 불렀다, 그는 문무를 겸비했으며 부정·불의·비리를 용납지 않는 강직하고 청렴한 성품을 지녔으므로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30년(세종12)에 예문관 검열이 되었으며 한림을 거쳐, 이듬해에 태조, 정종, 태종 실록을 충주 사고에 직접 봉안하였다. 1436년(세종 18)에는 사간원 좌헌납, 이듬해에는 병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1439년(세종 21) 경상도 아사로 있을 때 순흥군에 이르렀는데 군수 김호생이 그를 맞아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그곳의 기생과 음식이 형편없고 군수 또한 못생겨 그가 꼬집어 말하기를 “기생의 낯빛은 비록 희나 주인의 코는 붉으니 첫 번째 축하할 일이고, 군은 비록 작으나 술잔을 크니 두 번째 축하할 일이며, 밥은 붉고 장은 희니 세 번째 축하할 일이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뒷날 사람들이 순흥삼하라 일컬었다.

  1443년(세종 25)에는 의정부 사인, 이듬 해에는 봉상시 윤, 1445년에는 함길도 도진무에 임명되었다. 1448년(세종 30)에 형조 지사, 1449년에 병조 지사에 겸임되었고, 1450년에 병조 참의, 승정원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에 임명되었다.

  1451년(문종 1)에는 함길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그 해 11월 그 지방에 둔전제를 실시한 성과가 커서 국왕의 친제포유를 받았으며, 1452년 함길도 관찰사에 재임명되었다. 1453년(단종 1)에 형조 참판, 함길도 병마도 절제사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계유정난이 일어나 반수양파의 거두로 몰리기도 하였으나 이징옥의 난이 일어나자 함길도 병마도 절제사로서 북방 안보에 기여했으며, 또 이해에 천추사에 선임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5년(세조 1) 공조판서에 임명되었고, 삼군 도진무를 겸임하였다. 이 무렵 족친 박팽년과 밀교하면서 성삼문등 동지를 모아 단종 복위를 모의하고 그 영도자로서 거사를 지시하고 군사동원의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1456년(세조 2) 6월 김질의 밀고로 단종 복위운동은 실패하였다. 동지들과 함께 검거되었으며 세조의 혹독한 친국에도 굴복치 않고 순절하였다. 이 때의 주모인사 6인중 5인은 1691년(숙종 17)에 신원·복관작 되었으나, 신원자료로 쓰인 「육신전」에 그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어 신원에서 제외되었다.

  이에 1717년(숙종 43)에 8세손 김이휘가 신문고를 쳐서 그의 신원을 호소했으나 실패하였다. 뒤 이어 1731년 (영조7)에 10세손 김정구가 다시 그의 신원을 탄원하여 동학사 숙모전에 소장되어 있는 병자원적의 기록에 의하여 원적·복관작 되었다.

  그리고 1778년(정조 2)에 충의의 시호를 받았으며, 1781년(정조 5)에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 부사, 경연·춘추관 지사, 홍문관 대제학, 성균관 지사, 세손이사에 증직되었다. 1790년(정조 14)에는 출생지인 이원면 백지리에 유허비가 세워지고, 이듬해에는 영월의 장릉 충신단 정단에 배향되고 불천위패를 봉안하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1977년 9월 22일에 정사인 「세조실록」 기록에 근거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세조조에 가려진 육신”이라 판정하여 현창하여야 된다고 사단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시에서는 1978년 5월 18일 사육신 묘역에 허묘를 봉안하고 의절사에 위패를 모셔 현창해 오고 있다.

  그는 1802년(순조 2)에 김천 섬계서원에 봉안된 이래, 나주 화암서원, 옥천 호계서원, 안의 화림사, 진주 도동서원, 공주 육당서원, 은진 갈산사, 강령 충렬사, 안산 오충사, 장흥 충렬사, 부여 왕의영당, 수원 오정각, 김천 경의당, 거창 오례서원, 달성 금회영각, 공주 동학사 숙모전, 경주 나산서원, 무주 가일사, 의성 덕양서원, 진안 구산서원, 양주 삼충단, 노량영당 등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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