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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의인물

전승업(全承業)

옥천의 인물 전승업

칠백의 총을 세운 의병 참모장 인봉(仁峰) 전승업(全承業 : 1547 ~ 1596)

옥천 출신의 인봉(仁峰) 전승업은 임진왜란 때에 금산에서 장렬히 최후를 마친 700 열사들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중봉 조헌의 시신을 수습한 인물이다. 전승업의 자는 효선(孝先), 호는 우재(愚齋)인데 만년에는 인봉(仁峰)으로 불렸다. 본관은 옥천이며, 선산 곽씨를 어머니로 하여 1547년(명종 2)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에서 태어났다.

  옥천 출신의 인봉(仁峰) 전승업은 임진왜란 때에 금산에서 장렬히 최후를 마친 700 열사들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중봉 조헌의 시신을 수습한 인물이다. 전승업의 자는 효선(孝先), 호는 우재(愚齋)인데 만년에는 인봉(仁峰)으로 불렸다. 본관은 옥천이며, 선산 곽씨를 어머니로 하여 1547년(명종 2)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본디 과거를 보는데 필요한 글들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어버이의 명으로 과거 공부를 하여 1568년(선조 2) 증광초시에서 장원하고 선조 5년에 또 급제하였으나, 거듭 회시에서 낙방을 하고, “선비가 참됨을 잃는 데는 과거 시험을 자주 보는 것 같은 게 없다” 하고 과거 공부를 집어 치우고 자신의 인격을 닦는 학문에 힘썼다. 이후, 천거에 의해 중학교수?동문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친의 병이 더욱 심해져 사양했다.

  벼슬을 그만두고 보은에 와 있던 조중봉은 1584년(선조 17) 옥천 안내에 은둔하고 있었다. 이에 인봉은 조중봉이 있는 곳을 왕래하며 도의를 강론한다. 인봉은 본디부터 산수를 즐겼는데 조중봉과 서로 당시의 상황에 우려를 표하고 왜란이 있을 것을 미리 예측했다. 1592년 4월 임진란이 일어나고 왕이 수도를 떠나자 그는 인봉정사에 있다가 통곡하며 ‘임금이 피난을 갔는데 신하가 집에 있다고 앉아서 바라만 볼 수 있겠는가?’ 하고 큰 아들을 중봉에게 보내 거의(擧義)할 것을 약속했다. 이어 건장한 종 100여명을 모으고 잡곡 등 100여석을 모아 우선 군량미로 충당한 다음 청산?영동에 격서를 보내 군량미를 모았다.

  8월 선생과 중봉은 1,500명의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 서문 밖에 진을 쳤다가 적과 싸워 크게 승리했다. 이를 왕에게 알리기 위해 사람을 보냈는데 관군과의 충돌로 인해 전달되지 못하자 직접 글을 왕께 전하고자 길을 떠났다. 그러나, 조중봉이 금산의 적을 치다가 전군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봉사(封事)를 곽현에게 주어 전하도록 하고 곧바로 금계의 싸움터로 돌아와 700 의병과 승군 300의 시신을 거두어 큰 무덤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중봉의 시신을 수습하여 옥천으로 돌아와 장례를 지내고 중봉이 나라에 올린 글과 기타 잡저를 모아 조중봉의 유고집을 만들었다. 이후 중봉의 모부인과 아들을 인봉초당에서 함께 지내게 하였고 마음을 다해 도왔다.

  인봉은 평소 병이 있었는데 임난을 격을 후 더우 심해져 날마다 약을 복용하면서도 금계에서 조중봉 등과 함께 죽지 못했음과 왜적을 섬멸하지 못했음을 한으로 여기다 1956년 봄에 정사에서 갑자기 세상을 떴다. 묘소는 동이면 금암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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