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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의인물

송시열(宋時烈)

옥천의 인물 송시열

송시열(宋時烈 : 1607 ~ 1689)</

우암은 1607년(선조40년)에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옹원 봉사를 역임한 송갑조(宋甲祚)이며, 어머니는 선산 곽씨로 봉사 곽자방의 딸이다. 이 곳에서 26세까지 살았으며 후에 대전 회덕의 송촌, 비래동, 소제동 등지에 살았으므로 회덕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자는 영보(英甫)이고, 호는 우암(右菴)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우암이 공부하던 곳은 용문서당이 있으며, 이지당과 창주서원 묘정비도 현재 남아있다.

  우암은 1607년(선조40년)에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옹원 봉사를 역임한 송갑조(宋甲祚)이며, 어머니는 선산 곽씨로 봉사 곽자방의 딸이다. 이 곳에서 26세까지 살았으며 후에 대전 회덕의 송촌, 비래동, 소제동 등지에 살았으므로 회덕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자는 영보(英甫)이고, 호는 우암(右菴)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우암이 공부하던 곳은 용문서당이 있으며, 이지당과 창주서원 묘정비도 현재 남아있다. 이지당은 중봉 조헌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서당으로 각신서당이라고 하다가 우암이 시전에 있는 “산이 높으면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 행실은 그칠 수 없다.” 라는 문구에서 끝의 止자를 따서 이지당(二止當)이라 했다.

  22세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그의 비통함은 지극하였고 3년을 하루같이 여막(廬幕)을 지켰으며, 24세때 상복을 벗은 후 연산(連山)에 은거하는 당대의 거유(巨儒) 김장생에게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그의 아들 김집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때 생원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여 이때부터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그는 낙향하여 10년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제야학자들은 대거 기용하면서 그는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그러나 다음해 2월 김자점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동향을 밀고함으로써,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일파는 모두 조정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1655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10년 가까이 향리에서 은둔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아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계획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 9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의 복제문제로 예송이 일어나고, 국구 김우명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 때문에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는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후에 장기·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그는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정계에 복귀하였다. 그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 김석주·김익훈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신삼고변 사건에서 그는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였으므로 서인의 젊은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또 제자 윤증과의 불화로 말미암아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을 낳아 원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는데, 이 때 그도 세자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 해(83세)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그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해에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그를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해에는 시장없이 문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덕원·화양 등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소에 이르게 되었고 그 중의 병신처분과 1744년(영조20)의 문묘배향으로 그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고,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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