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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의인물

박승무(朴勝武)

옥천의 인물 박승무(朴勝武)

한국화의 거목 심향(心香) 박승무(朴勝武 : 1893 ~ 1980)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소하(小霞)?심향(心香)?심향(深香). 서울출신. 의정부 승지를 지낸 경양의 장남으로 태어나 새로운 교육제도의 소학교를 졸업하였다. YMCA 중학부에 다니다가 그림에 흥미를 가지게 되어 1913년 서화미술회 강습소에 입학하였다. 조석진과 안중석에게 전통 화법을 배웠다.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소하(小霞)?심향(心香)?심향(深香). 서울출신. 의정부 승지를 지낸 경양의 장남으로 태어나 새로운 교육제도의 소학교를 졸업하였다. YMCA 중학부에 다니다가 그림에 흥미를 가지게 되어 1913년 서화미술회 강습소에 입학하였다. 조석진과 안중석에게 전통 화법을 배웠다. 1916년 졸업후 다음 해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에서 화법을 연구하였다. 1919년 무렵 중국에서 돌아와 서화협회 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협회 전람회(1921~1936)와 초기 조선미술전람회에 사실적인 수법의 향토적 풍경을 출품하며 전통 화단에서의 위치를 굳혔다. 광복 후에는 50대에 접어든 안정된 기법으로 귀착하여 완전히 옛 법에 충실한 전통 산수로 독자적인 양식을 정립시켰다.』

  위 글은 한국민족문화백과에 있는 박승무에 대한 소개 글이다. 위 소개 글로만 보면 우리가 박승무라는 인물을 왜 선양해야 하는지, 기억해야 하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유명한 동양화가라 할지라도 우리 고장 출신이거나 적어도 우리 고장과 관련 있는 사람이라야 기릴 수 있는 명분이 주어지는 것 아닌가?
그런데 옥천 사람들이 그를 기려야 할 이유가 밝혀졌다. 출생지가 서울이라고 알려진 박승무의 출신지가 우리 고장이라는 사실이 황효순이라는 미술평론가에 의해서 밝혀졌기 때문이다.

  심향의 초등학교 기록을 찾아 나섰던 황효순은 심향이 서울이 아니라 옥천 사람일 것이라는 추정 아래 그가 졸업한 죽향초등학교 졸업생 명부에서 박승무라는 이름을 발견했고, 그가 서울로 가기 전에 졸업한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에 돌아와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하게 된다. 황효순은 심향이 말년을 보낸 대전 대흥동의 사망 신고서를 조회한 결과, 출생지 주소가 ‘옥천군 군북면 구증리’라는 기록을 발견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구중리라는 지명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박승무라는 이름으로 찾아보니 생년이 일치하는 기록이 나왔다. 국원리의 옛지명인 구건리를 대흥동 기록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구중리로 잘못 쓰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황효순이 심향의 출생 기록을 확인함으로써 박승무라는 우리나라 동양화의 대가는 옥천 사람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증명되었다. 다시 정리하면 박승무는 1893년 8월 26일 옥천군 군북면 국원리 255번지에서 태어났다. 호적에는 아버지 박경양과 어머니 유정숙의 장남으로 기록되어 있다. 박승무가 태어나면서 큰아버지 박경양에게 양자로 입적되는 바람에 그의 친아버지와 친어머니는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다.

  평단에서는 심향 박승무의 작품세계가 일생동안 세 번 변화하고 있다고 본다. 제1기는 1913년에서 1926년까지로, 스승 조석진, 안중식의 작품 모방과 재현에 충실한 시기로써 수련기에 해당한다. 제2기는 1927년부터 1934년까지로, 스승의 화풍을 탈피해 자기만의 작품을 준비하는 시기하고 볼 수 있다. 제3기는 1935년부터 1980년 심향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로, 서울과 대전에서 자신의 작품세계에 우리나라의 자연을 도입하여 독자세계를 구축하였다. 그의 변화하는 작품세계를 보면서 황효순은 초기 중국 산하를 배경으로 한 작품세계를 벗어난 이후 낮아지고, 완만한 곡선의 봉우리, 향적이고 수평적인 구조로 작품세계에 나타난 산천들이 고향 옥천을 그린 것이라고 해석한다. 조선 미술전람회 등에 출품했으며 1946년 고희동 등이 주도하는 조선미술협회에 참여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국전)에 제1~3회의 추천작가로 참여했고, 제4회 초대작가로 선정되었으나 국전의 문제점을 들어 이를 거부하고 재야작가로 남았다. 6·25전쟁 이후 대전에 정착해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57년 충청남도 문화상을 받았고, 1971년 '동양화 6대 가전'에 초대되어 서울에 진출했다. 1974년 원로작가초대전에 출품했고 1976년 회고전을 열었다. 전통적 양식에 따른 겨울풍경을 주로 그렸으며 절제된 묵화를 통하여 동양정신을 반영했다는 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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