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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의인물

정순철(鄭淳哲)

옥천의 인물 정순철(鄭淳哲)

한국 동요의 선구자 작곡가 정순철(鄭淳哲 : 1901 ~ 195?)

국민 동요 ‘짝자꿍’을 작곡한 정순철은 ‘반달’의 윤극영, ‘오빠생각’의 박태준, ‘봉선화’의 홍난파 등과 1920년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동요작가였다.

동학 2세 교주인 최시형의 외손자이기도 한 정순철은 충북 옥천군 청산면 교평리에서 태어나 방정환, 정병기 등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했으며 1929년 동요작곡집 ‘갈닙피리’를 발행했다.

  작곡가 정순철은 1901년 옥천군 청산면 교평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최윤은 동학의 2세 교조인 해월 최시형의 딸이다. 동학의 교주인 최수운이 참수형을 당하고 난 뒤부터 30여년의 세월동안 최시형은 몸을 피해 쫓겨 다니며 포교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부인 김씨는 그 와중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딸 최윤은 동학혁명이 일어나던 1894년 옥천의 민보단에 붙잡혀 관아에 갇히고 말았다. 그 후, 현감은 통인(通引) 정주현에게 최윤을 데려가 살라고 내 주었고, 정순철은 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일(延日)이고, 어릴때 이름은 분답이며, 자는 성춘(星春)이다. 청산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던 정순철은 학교를 중퇴하고 집을 나와 옥천역에서 화물차에 몰래 숨어 타 서울로 올라갔다. 이후 동학 3세 교주인 손병희의 배려로 1919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정순철은 방정환과 절친하게 지내며 ‘천도교소년회’ 활동을 같이 했다. 천도교소년회는 1921년 김기전, 방정환 등의 주도로 천도교청년회 산하에 결성된 모임이었다. 천도교소년회는 1923년 3월부터 월간 ‘어린이’를 창간하고 소년계몽운동을 주도했다. 천도교소년회의 이 운동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어린이 문화운동과 어린이 인권운동이었다. 정순철이 방정환과 함께 어린이 운동단체인 ‘색동회’를 창립하는 일에 참여 한 것은 함께 유학중일 때인 1923년이었다. ‘색동회’는 1923년 3월 16 발족해 5월 1일 방정환을 중심으로 정순철, 윤극영, 마해송 등이 가입하였다. 색동회는 1923년 3월 20일<어린이>지를 창간하였으며, 국내에 있는 천도교소년회와 연락하여 1923년 5월 1일을 어린이 날로 제정하였다.

  정순철은 1930년대 초에 색동회 회원인 정인섭, 이헌구와 함께 경성보육학교에서 보육교사들을 가르치며 ‘녹양회’라는 동극단체를 만들어 소나무, 백설공주, 파종, 금강산 등의 동화극과 학교극을 발표했다. 이 동극 안에는 수많은 노래가 들어있다. 모두 정순철이 작곡을 한 노래들이었다. 반달의 윤극영, 짝짜꿍의 정순철, 오빠생각의 박태준, 봉선화의 홍난파는 1920~1930년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동요작곡가였다.

  ‘어린이’잡지에 어린이들이 부를 창작동요를 작곡해 발표, 보급하는데 앞장 섰으며 동경유학을 마치고 국내로 돌아와서도 서울 경운동의 천도교 대교당을 중심으로 각종 어린이 운동을 전개했다. 동요작곡집 1집 ‘갈닢피리’에는 ‘짝자꿍’을 비롯해 ‘까치야’ ‘여름비’ ‘나뭇잎배’ ‘갈잎피리’ 등이 수록돼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정순철의 노래들은 잡지 ‘어린이’에 발표된 ‘형제별’(1923)을 비롯, 조선일보에 발표된 ‘자장가’(1928), 윤석중이 작사하고 정순철이 곡을 붙인 ‘졸업식 노래’(1948)까지 36곡이다. 이 외에도 ‘조선동요백곡집’(1946) 상권에 수록된 ‘시골밤’ ‘아기별’ ‘어깨동무’ 등을 합하면 40여곡에 이른다.

  정순철은 1931년부터 34년까지 경성보육학교에 재직했으며 1939년부터 41년까지 두 번째로 음악공부를 하러 동경에 들렀다. 1948년에는 서울 성신여고에서 교편생활을 시작 했으며 재직 당시 별명은 ‘한국의 베토벤’이라고 했다. 성신여고 재직 시 6.25가 발생했고 학교 교장이 피난을 가면서 정순철에게 학교를 부탁하여 학교에 남아있었다. 혼자 남아 있던 정순철은 인민군이 후퇴하던 9월 28일 납북되었고 그 뒤의 종적을 알 수 없다. 전쟁 이후 납북이든 월북이든 북쪽으로 간 사람들을 거론하는 것이 금기시 되면서 그의 이름과 행적은 서서히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가 작곡한 노래를 그렇게 많은 국민들이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기쁨으로 부르고 눈믈로 불렀으면서도 우리는 그의 이름을 모르고 살아왔다. 전쟁과 분단의 비극이 아니었다면 그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작곡가로 우리 곁에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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