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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호(朴錫浩)

옥천의 인물 박석호(朴錫浩)

현대 미술의 큰 바위 얼굴 한원(寒園) 박석호(朴錫浩 : 1919 ~ 1994)

죽은 후에야 그 가치가 더 정확하게 알려진 사람. 그가 살다간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았으나 평생을 추구했던 그의 작품 세계는 기어이 사람들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현대 미술의 큰바위라는 애칭까지 얻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일제의 무단통치에 온국민이 저항에 나선 삼일운동이 일어난 1919년 박석호 화백은 이원면 대흥리에서 아버지 박장흠과 어머니 주봉월의 2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호적상 1919년이지만 그의 작가 연보에 나와 있는 출생연대는 1921년이다. 그가 태어날 당시 이원면은 이남면과 이내면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가 태어난 주소는 이남면 건진리다. 아버지 박장흠은 4대 독자로, 손이 귀한 집에서 태어났으며, 두 형제였지만 형 박병호가 세상을 떠나면서 고향에서는 그의 행적을 증언해 줄 만한 친적을 만날 수가 없다. 다만,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가 선대를 이어 살던 곳이었고, 어머니가 옥천 이원에서 박석호를 낳았다.

  이원면에 가서 주민들에게 물으면 박석호라는 화가가 이원 출신인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양화가인지조차도 모른다. 세상을 떠난 후에야 세상에 이름을 알린 이가 한원 박석호 화백이다. 그가 태어난 이원면에서조차 그의 이름을 몰랐던 것은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경북 김천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등 줄곧 고향을 떠나 생활했기 때문이다. 부인 김건태씨에 따르면 박석호씨는 18세인 1936년 15회로 이원소학교를 마치고 경북 김천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후 서울로 가서 관동(지금의 영천)에서 하숙을 하던 중 친구의 소개로 만나 1944년 결혼을 하였다고 한다.

  1949년 박석호는 처음으로 생긴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1회 신입생으로 입학, 한국전쟁을 겪은 후 1953년 졸업하게 되고, 졸업과 동시에 학교 조교로 근무하면서 스스로 ‘인간적 감화를 받았다’는 김환기를 만나게 되었다. 김환기는 박석호가 너무 착하다며 차게 살라며 한원(寒園)이라는 호를 지어주게 되었다고 전한다. 박석호는 1954년 홍익대를 졸업 하면서 모교 강사로 첫 출발을 했고, 1960년 대 전반을 모교에 있으면서 창작활동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1956년 8월 신인회 창립회원이 되어 창립전에 5점의 작품을 출품한다. 신인회전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이 시기를 박석호 예술세계의 1기라고 미술계에서는 본다. 박석호가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그가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독특한 화풍을 구축하며 진솔하게 자기의 시대를 살다가 갔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세상 위로 끌어 올린 것은 1996년 4월 12일부터 5월 1일까지 19일간 예술의 전당이 개최한 재조명 작가전 첫 순서로 박석호전을 가진 것이 계기가 되었다. 재조명 작가전은 박석호라는 화가가 어느 누구의 화풍이나 계열에도 이름을 내지 않고 있으나 이미 한국 미술계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많은 이들이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는 서민의 생활을 보다 진솔하게 담아내기 위해 동해안과 남해안일대를 순회여행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어촌' `포구' `어부들' `해변' `입항' `부두' `기다리는 사람들'의 작품을 쏟아냈다.

  참으로 공사가 확실했던 고집쟁이 작가!
그래서 시류에 영합함이 없이 사회적 명예와도 담을 쌓고 오직 자기사고와 자기 방식대로만 작품을 했던 박석호는 1992년 어느날 갑자기 쓰러져 1년 반 동안의 투병 끝에 1994년 임종을 맞이 했다.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북한산 비봉자락에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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