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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의인물

조동호(趙東祜)

옥천의 인물 조동호

조동호(趙東祜 : 1892 ~ 1954)

조동호는 1892년 청산면 백운리에서 아버지 조명하와 어머니 박빈 사이의 3남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의 글솜씨는 뛰어나 어른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가 향리에서 한학공부를 하면서 영동, 옥천 등 고향 인근에서 한학자들이 모이는 시문회에서 불과 다섯 살 정도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한시를 짓는 등 신동이라 불렸다.

  조동호는 1905년 개교한 청산초등학교에 입학, 3년간 학교를 다녔다. 이후 1908년 서울로 가서 국립경성측량학교에 입학해 1910년 졸업을 하고 1911년부터는 측량기사로 근무를 하지만 국권이 침탈됐다는 사실에 절치부심하며 울분을 삼킨다. 이 때 조동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동반자를 만나게 된다. 몽양 여운형(독립운동가, 정치가, 언론인, 1886~1974)이다.

  1914년 여운형과 함께 난징으로 망명해 금릉대학 중문학과에 입학했다. 조동호는 1912년 조직되어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인 동제사에 1916년 가입하고 여운형, 조소앙, 선우혁 등과 함께 이사직을 맡아 활동했다. 동제사는 1910년대 상해에 있는 유일한 독립운동 결사체로서, 핵심적인 구실을 했다. 1918년 11월에는 여운형, 장덕수 등과 함께 조선독립과 청년학생 교양을 목적으로 신한청년당을 조직했다. 1919년 4월 상해임시정부의 조직과정에서 이동녕·여운형 등과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충청도 대표로서 임시정부를 공식 발기한 29인의 임시의정원이었으며, 4월 13일 수립 선포된 상해임시정부에서는 국무위원으로 참여했다.

  또한 1922년 10월에는 여운형·김구(金九)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를 조직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으나, 그해 12월경 상해 임시정부의 열악한 사정과 활동상의 한계 등으로 귀국을 결심하게 된다.

  귀국 후 1920년대 초부터 독립운동 방법, 항일투쟁을 위한 방편으로 사회주의 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동아일보〉 논설위원과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화요회에 참여했다. 1925년 4월 17일에는 김재봉(金在鳳)·김찬(金燦)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을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 겸 조직부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그해 6월 조선공산당 대표로 모스크바에 가서 코민테른의 정식 승인을 받았다. 1928년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복역하다가 1932년 10월 출옥했다. 이후 〈조선중앙일보〉 논설부 기자로 일하다가 젊은이들을 독립운동가로 양성할 목적으로 중국에 유학을 보냈다는 이유로 옥고를 치렀다.

  1944년 여운형·이석구·현우현 등과 함께 조선건국동맹의 조직을 주도했다. 사회주의자들과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된 조선건국동맹은 이후 지방조직을 갖춘 전국적 조직으로 성장했다. 또한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조선독립동맹과 연락을 취했고, 경기도를 중심으로 농민동맹도 조직했다. 조선건국동맹의 내무부장 겸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다가 1945년 8월 4일 이걸소(李傑笑)·이석구 등과 함께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해방 후인 1945년 8월 16일에 출옥한 뒤 조선건국동맹을 모체로 하여 조직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선전부장을 역임했다. 그해 9월 14일 조선인민공화국이 조직되자 중앙위원 겸 내무부장 대리로 선출되었고, 1946년 2월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중앙위원이 되었다. 3당합당 때는 박헌영의 남조선노동당 노선에 반대하여 여운형의 사회노동당에 참여했고, 1947년 4월 근로인민당이 조직되자 정치협의회 위원, 미소공동위원회 대책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그해 7월 19일 몽양 여운형이 암살당하면서 근로인민당도 곧이어 해체되었고, 중심축을 잃은 조동호는 사실상 사회 활동에서 은퇴하고 수원 눈님 댁과 고향 청산을 오가며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건강을 지키려 투병생활을 했다. 그리고 1954년 고향에서 60여 평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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