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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의인물

송건호(宋建鎬)

옥천의 인물 송건호

송건호(宋建鎬 : 1927 ~ 2001)

송건호는 1926년 옥천군 군북면 비야리에서 아버지 송채찬과 어머니 박재호의 3남 5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송건호는 은진 송씨인데 그의 조상은 대대로 충남 대덕면 동면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런데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온 가족을 이끌고 인근 산너머 비야리라 불리는 두메산골로 이주를 하게 된다.

그의 증조할아버지가 느닷없이 이주를 결심하게 된 것은 그의 남다른 민족의식 때문이다.

  나라가 망하자 왜놈들 보기 싫다며 스스로 호를 ‘하곡’이라 짓고는 첩첩 산골을 찾아 이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송건호는 1934년 아홉 살에 증약사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보통학교 시절 송건호는 70명 남짓한 학급에서 공부를 잘하는 편에 속했다. 1940년 송건호는 경성에 있는 한성사립상업학교에 진학을 하게 된다. 그의 상업학교 진학은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였다. 왜놈 밑에서 공부는 무슨 공부냐며 일제에 빌붙어 출세를 바라지 말고 그저 상업학교나 졸업해서 취직을 하라는 것이 그의 부친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상업학교를 졸업한 송건호는 잠시 고향에 내려와 일본군 식량창고 사무원 노릇을 했는데, 바로 이때 감격스런 해방을 맞는다. 해방 후, 송건호는 상경하여 진학 시험을 치르는데 그것은 뜻밖에도 연희전문학교(연세대) 신학과였다. 하지만 이 학교는 보기 좋게 낙방하고 다시 도전해서 합격한 곳이 경성법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다. 6.25 전쟁으로 학업을 잠시 중단했던 송건호는 전쟁의 와중에 영어 공부에 몰입하였다. 결국 그 때 쌓은 영어 실력 덕분에 그는 철도국 통역관으로 취직을 하게 되었으며, 이 때의 경험이 훗날 그가 언론사의 길을 걷게 되는 데 결정적인 동인으로 작용했다.

  경제관념이 희박하고 고지식한 송건호에게 야무지고 다부진 아내를 만난 것은 그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도 큰 행운이라 할 수 있다. 빠듯한 경제 여건에서도 집안 살림이 무리없이 유지되었던 것은 남다른 생활력을 지닌 그의 아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건호가 아내 이정순을 만난 것은 1952년 말 중매를 통해서였다. 그녀의 백부가 대덕군 동면의 은진 송씨 동네로 피난을 와 있다가 조카 딸을 송건호와 맺어준 것이다.

  송건호의 호는 청암(靑巖). 한국의 자유언론 수호를 위해 애쓴 진정한 언론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1956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1954년 〈조선일보〉 외신부 기자, 1958년 〈한국일보〉 외신부 과장, 1959년 〈자유신문〉 외신부장, 1960년 〈한국일보〉 논설위원 등을 거쳐 1963년 〈경향신문〉 논설위원, 1965년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1969년에는 〈동아일보〉로 옮겨 논설위원, 1974년에는 편집국장이 되었다. 1974년 〈동아일보〉 기자들이 10·24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같은 해 12월 10일부터 당국에 의한 광고 탄압이 있은 후 기자들의 대량 해직사태가 일어나자 3월 15일 편집국장직을 사임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기도 했다. 1984년에는 해직 언론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의장으로 선임되었고, 1988년에는 한겨레신문사 사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재선을 거쳐 1991~93년 회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민족지성의 탐구〉·〈한국현대인물사론〉·〈해방전후사의 인식〉(공저) 등이 있으며, 금관문화훈장·한국언론학회언론상·호암언론상·심산학술상 등을 받았다. 지병으로 별세한 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송건호의 장례식은 한겨레신문사가 주관하여 엄숙하게 치러졌고, 국립5.18 민주 묘지에 안장되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언론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른 것은 송건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의 위패는 그의 고향 인근의 군북면 감노리에 소재한 사찰 보륜사에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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